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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1 :: 2009/04/16 18:41

26년 동안 강단을 지키며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며 그 밖의 활동과 거리를 유지해온 저자는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를 통해 뜨거운 이슈인 대운하사업, 종합부동산세 개편, 한미 FTA, 주택정책, 경기부양책, 교육개혁 등을 날카롭게 통찰했다.
젊었던 시절 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글을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원고 청탁이 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거절해버리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한 데는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의 충고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분에게서 젊었을 때부터 신문에 글 쓰기 시작하면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다 보면 원고 쓰는 일이 무척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은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교수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반드시 언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는 자신의 강의실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 때문에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서슴없이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교수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 제가 생각했던 바는 대략 이랬습니다. ‘강의실에서는 학문적 지식의 전달뿐 아니라, 인생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수가 강의실에서 한 말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활동을 할 단계에 이르러 그들의 행동에 반영된다. 따라서 교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학생들을 이끌어 감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신문에 글 쓰는 일에 그리 큰 보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고 청탁을 한 번, 두 번 거절하고 나면 그 뒤로는 청탁이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 그 교수는 원고 청탁해도 바로 거절해버려”라는 말이 돌면 구태여 청탁을 하려 들지 않나 봅니다. 아마 그때 저에 대해서도 그런 평판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년에 이르렀을 때는 원고 청탁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상태가 그리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책을 써낸 바람에 그것들을 개정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간혹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한두 개의 글을 써서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런 제 심경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3년 전쯤이었습니다. 갑자기 보수의 물결이 우리 사회를 휩쓸게 되면서 오직 한 가지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시장은 좋고 정부는 나쁘다. 환경규제든 부동산규제든 모두 풀어버려야 한다. 기업의 기를 살려줘야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 부자를 못살게 굴면 안 된다.” 어디를 가든 이런 소리만 들릴 뿐 이와 다른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신문을 펴들고 그 안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느 신문인지만 알면 그 안에 무슨 얘기가 씌어 있을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뿐 아니라 칼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쓴 칼럼인지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이름을 가려놓으면 누가 쓴 글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가 쓴 글과 신문사 논설위원이 쓴 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한편으로 짜증스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들여가며 그런 뻔한 글을 왜 쓰느냐는 생각이 저를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얘기는 이미 수없이 많이 나와 있는데 구태여 또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면 엉터리도 진리처럼 들리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고 또 저 사람도 똑같은 말을 하니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가 보다 하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여론이 무작정 한쪽으로만 쏠리는 걱정스러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보수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것도 합리적 보수가 아닌 거의 도그마에 가까운 보수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거센 기세에 눌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조차 변변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말이든 틀린 말이든 조금이라도 진보의 색채가 내비치면 가차 없이 매도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보수 일변도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목소리를 내주지 않으면 사회적 균형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기감마저 감돌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상아탑에 안주해 입을 닫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저로 하여금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