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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2008/07/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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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지음 | 김아타 표지 사진 | 12,000원 | 324쪽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독특한 한 권의 책
인터뷰와 독서 에세이의 절묘한 만남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책으로 만나본다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책 소개>
정혜윤 PD가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의 이야기.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을 책으로 엮어본 작은 전기이다. 한 개인이 책과 만나는 지점에 관한 이야기가 주축이 되고 있다. 정혜윤, 인터뷰이, 책이라는 세 명의 주인공이 균형감 있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번 작품의 방점은 무엇보다 책에 있다. 인터뷰이들의 삶을 바꾼 책들을 통해 그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책을 만난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책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는 정신에 대한 헌사
                          
_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으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두 번째 에세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10월부터 온라인 서점 예스24 웹진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이 책은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독특한 개성의 인물 11명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하지만 이 책은 평범한 인터뷰집이 아니다. 저자는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를 통해 한 인물의 정신적 행로를 그려 보이고 있다. 짧은 텍스트 안에 응축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문학적, 사상적, 철학적 시발점을 만나는 즐거움과 동시에 책에 대한 각자의 독특한 감수성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책 전반을 관통하는 아련한 분위기―다락방에서 책을 읽는 어린 활자중독자들의 내면세계―를 담담하게 연출한 표지 사진은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아타가 촬영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을까?
                                
_우리 시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11인’,
 그들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쥐다

우리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 문소리,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대명사 진중권, 첫 장편소설로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차세대 유망주 정이현……, 도대체 그들은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질문의 해답을 그들이 읽은 책에서 찾고 있다. 현재 그들이 다다른 지점에 이르기까지 점점이 박혀 있는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책과 연관시켜 그들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는 낯익은 작품 속의 인물들과 주제, 작가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인터뷰이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아픔과 고통, 깨달음과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있다. 공식적인 발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인터뷰이 개개인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체험들이 대중들에게 익숙한 책에 기대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독자는 진중권의 신랄한 비판적 정신이 마크 트웨인에 빚지고 있음을, 변영주의 우렁찬 목소리 뒤에 김지하의 시가 있음을, 임순례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 저변에 제인 구달과 소로우의 철학이 깃들어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이진경이 꼽는 가장 아름다운 책이 《벽암록》이고, 박노자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이 《장자》이고, 변영주가 인생의 교훈을 얻은 책이 《슬램 덩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의 숨겨진 일면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책, 그것은 결국 소통이다
                                            
_한 인물의 개인적인 독서를 넘어선 책에 대한 오마주
 전작과 마찬가지로 정혜윤은 소설과 시를 비롯해 고전과 인문서, 베스트셀러 등 국내외 분야를 폭넓게 아우르는 깊은 책 읽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는 사적인 독서 체험을 확장시켜 소통으로 가는 길을 모색했다. 동일한 책을 매개로 끝없이 이어지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책에 관한 수다(?)는 책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이를 통한 존재의 다양한 실존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책과 책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섬세한 결을 통해 한 인물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는데, 그녀만의 독특한 인물 해석은 가히 독창적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동일한 책에 다다르는 다양한 길(임순례와 정이현은 둘 다 폴 오스터를 사랑했지만 그들이 폴 오스터의 작품에 공명하는 부분은 상이하다)에 관한 이야기는 한 개인의 주관성과 책의 객관성이 은밀하게 섞이면서 형성되는 유니크한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세계는 한 개인의 정신세계를 넘어서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때론 한없이 유쾌하고, 때론 지독히 엄숙한 독서 여정은 한 개인이 책을 통해 한 시대와 교우하면서 온몸으로 구현해낸 지난 시대의 아픔과 환희를 그려 보이고 있다.

활자중독증에 걸린 책벌레들, 그들의 유별난 감수성을 만나다    
        
_독서, 그 순수한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다양한 개성의 인물들이 독서라는 행위의 순수한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고, 다른 세계를 만났던 이야기는 책이라는 존재가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을 증거한다. 책의 무게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책을 자유롭게 이용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간 이야기. 책과 만나고 그 책을 통해 다시 세상과 만난 이들의 이야기. 특히 활자가 그들의 시선을, 마음을 사로잡았던 순간의 이야기는 순수한 독서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이들에게 아스라한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아울러 인터뷰 중간 중간에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장서가나 애서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지은이 및 표지 사진작가 소개>
지은이: 정혜윤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 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따라 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 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의 창시자이고 싶어 한다.

<김어준의 저공비행>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행복한 책읽기>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휴먼다큐 등을 기획?제작한 시사다큐 전문 프로듀서로, 현재 <시사자키>와 <뉴스쇼 스페셜-책과 문화>를 담당하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으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표지 사진: 김아타

현대미술의 본거지 뉴욕을 뒤흔든 세계적인 사진작가. ‘나(self, ego)와 존재’에 대한 관심을 담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시리즈, 관념으로부터의 해체를 담은 ‘해체(Deconstruction)’ 시리즈, 유리 박스 안에 성과 폭력, 이데올로기 등을 담은 ‘사적인 박물관The Museum Project’ 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뉴욕, 베이징, 상하이, 인디아 등을 오가며 시간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 정신을 담은 ‘ON-AIR 프로젝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목차
 
진중권 _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이현 _불안으로 가득한 삶 안에 숨어 있는 열정
공지영 _세상과 자신 사이의 화해, 나는 살기 위해서 읽었다
김탁환 _한 권의 책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임순례 _어떤 인물도 딱히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
은희경 _읽었던 것들의 지혜가 끝나는 순간의 새로운 깨달음
이진경 _저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에요.
변영주 _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신경숙 _한 시절의 순수를 찾아서 자기 자신을 소모해버린 끝의 긍정
문소리 _빛은 내부에서 온다
박노자 _불교와 장자에 심취한 사회주의자

정혜윤 PD의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내용 엿보기 - 은희경 편

 

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수록된 「고독의 발견」에 doors의 노래 ‘people are strange’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편을 끼워 넣었다. 그 문장들은 이렇다.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낯선 존재가 된다
네가 혼자일 때 타인의 얼굴을 모두 추악해 보인다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때 여자들은 모두 사악하다
네가 힘들 때는 걷는 거리조차 울퉁불퉁하다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네가 낯선 존재일 때, 네가 낯선 존재일 때
- doors의 <people are strange>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엔 문이 있다.
-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 동안 건축학자 짐멜의 말이 공감각적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로마 대성당 혹은 고딕식 성당에서 벽면을 차지하던 입구가 차차 줄어들어 고유한 의미로서의 문으로만 남게 됐을 때 그리고 반기둥들과 조형물들의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그 사이에 문이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이러한 문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히 사람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이 같은 구조는 마치 자명하지만 부드러운 제약처럼 방문자를 바른길로 확실하게 이끈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중에서)

그래서 짐멜에게 인간은 “경계 없는 경계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문의 역할은 이제 변했다. 문은 더 이상 타인에게 넘어오라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드럽게 손짓하는 세계가 아니라 구획 짓고 밀어내는 세계로 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독의 발견이 아니라 고독의 발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독의 발명 시대에도 고독의 발견은 최초의 단서란 점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즉,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모두 낯선 존재가 된다”는 단서를 찾아서. 한때 스스로 만들어낸 비밀과 고독 속에 있던 소녀가 (즉, 고독을 발명하던 소녀가) 「고독의 발견」이란 글을 쓰기까지 은희경은 어떻게 살았을까? 도어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또 다른 시에서 자신들의 팀 이름을 발견한다. 그 시구는 이렇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나리.” 은희경은 그걸 알았을까?


은희경은 전북 고창에서 건설업을 하는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다. 경제 규모에 비해서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았던 그 마을의 이미지는 그녀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의 서두에 매혹적으로 드러난다.

K읍은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라고 불리어왔다. 그래서 K읍 출신이라고 하면 예사로 보지 않으며 인물로 보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 같은 것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K읍 사람들의 교육열은 유난한 데가 있어 웬만한 집의 장남들은 으레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마치는 대로 도시로 보내졌다. 여행자들이 길이라도 묻기 위해 어느 집 마루에 걸터앉으면 높다랗게 내어 걸린 사진틀 속에서 도시에 나가있는 그 집 장남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채송화 봉숭아 따위가 심어진 보잘것없는 마당과 어둑식한 대청마루,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뒤란 할 것 없이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늘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갈망과 불만 속 체념의 기운을 포찰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 교육열 높은 소읍에서 여섯 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덜떨어진 한편 도도한 꼬마 숙녀 은희경은 어느 날 엄마 아빠와 함께 택시를 타고 전주로 나가 전주에서 가장 큰 서점(홍지서점 정도로 우리는 기억을 맞췄다. 전주에서 자란 사람들은 아마 그 서점을 다 기억할 것이다. 그 서점 근처에 소문난 욕쟁이 할머니 콩나물국밥집이 있었으니까. 그 서점은 훗날 전주 출신 소설가 양귀자 씨의 남편이 인수했단 소문이 있다)에서 《새소년》 같은 잡지와 동화책 한 권을 선물 받았고, 그리고 양품점에 가서 에나멜 구두 한 켤레를 받았다. 반짝반짝 에나멜 구두와 함께 받았던 책의 제목은 ‘반지의 왕자’인지 ‘장미의 왕자’인지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도 그 첫 책의 기억은 스무 살 무렵까지 나이에 따라 각색되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중에 물어봐도 그 책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뒤로 많은 공주 왕자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책만큼 강렬하진 않았어요. 그 책은 제가 처음으로 엿본 환상의 세계 같은 것이었는데 그 환상은 시골 읍내에서 살고 있는 여덟 살짜리 시골 아이의 일상과 묘하게 연결되는 어떤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책 속의 왕자는 한결같이 멋진 왕자가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그 왕자는 장미꽃을 갖고 있으면 정말 멋진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그 순간 너무나 형편없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설정되어 있었어요. 세 가지 정도가 왕자의 삶의 제약 조건이었는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 반지를 빠트리면 안 된다,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장미꽃이 떨어지면 얼간이가 되고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픽픽 쓰러지는 왕자. 이 이야기가 나한텐 어떻게 읽혔느냐 하면, 완전히 거꾸로 읽히는 거죠. 지금 나는 이렇게 평범하지만 뭔가를 발견하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나만의 장미, 나만의 반지, 나만의 영지를 찾으면 진짜 멋져진다. 그걸 몰라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은희경이 첫 책을 쓰던 해, 소설을 쓰러 집을 나설 때 갖고 갔던 책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완벽하지 않은 왕자는 우리에게 그를 비웃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그를 통해 분수를 지키라거나 룰을 지키라는 교훈을 얻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우린 단점과 약점으로 서로를 위로하란 걸 알려주려고 등장하는 거다. 은희경은 고학년이 될 때까진 학교 도서관의 책을 굉장히 많이 봤는데 2층 맨 구석에 있던 2학년 1반 옆 교실의 어린이도서관 자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그 뒤론 그렇게 도서실이란 걸 열심히 다닌 일이 한 번도 없어서란다.

“그때도 어른들이 생각할 때 좋다고 생각한 책에 끌렸다기보다는 어린이 책치고는 악의에 차 있는 것들, 절망적인 것들에 오히려 인상을 받았어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예요. 아이가 병을 하나 주웠는데 병 속에 춤추는 악마가 들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불행을 벗어나려면 그 병을 누구에겐가 줘야 하는데 그걸 주는 행위는 알고도 남을 괴롭히는 행위이므로 고민이 되는 거죠. 난 이런 상황의 느낌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무심코 주운 빈 병이 불행의 계기였단 게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불운이 온다는 이상한 조숙한 깨달음 같은 것도 줬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남에게 짐을 떠맡겨야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보다 더 끌렸는데, 사는 게 좀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돌려 말하면 부모가 말하는 대로의 세상이라면 너무나 뻔한 것 아니냐? 그게 아닌 것 아닐까? 이런 것이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같은 책에 끌렸단 것인데 언제나 조숙한 아이들은 묻는다. “이게 다야?”라고.

은희경은 자신의 현재 문학의 전 재산은 초등학교 때의 글자 중독에 가까운,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 편력’이었다고 단언한다.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초등학교 때의 그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만큼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집에 배달되던 농민신문인 《새농민》도 열심히 읽고 《건설회보》도 읽었어요. 읽는 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어요, 『고금소총』 같은 금서도 초등학교 때 읽고 《고전 해학 전집》도 읽고 밤색 표지였던 여섯 권짜리 《강소천 전집》은 아주 좋아했어요. 《새농민》이 오면 연재소설을 꼭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가끔 빼놓고 못 읽으면 할 수 없이 지어내서 이야기해주고. 기억나는 소설은 월남 파병된 군인이 나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선에서 고향집에 두고 온 여자를 생각하는 장면엔 꼭 나오는 말이 ‘인명은 재천이다.’란 말이었어요.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별빛을 보면서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인명은 재천이다.’라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을 혼자 이해하고 나중에 써먹기 시작했는데 그 말이 누가 누구를 그리워할 때 하는 말인 줄 알고 연애 감정을 표현할 때 써버린 거죠. ‘난 네가 좋아.’라고 해야 하는데 ‘인명은 재천이다!’ 이렇게 고백을…. 또 하나 에피소드는 그런 연재소설엔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엿보는 장면이 꼭 나와요.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 주위엔 그렇게 엿보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책은 많이 읽었어도 애는 애니까 삼촌에게 물어봤죠. ‘옛날에는 첫날밤에 구경할 만한 재미난 일을 하던데, 요새는 첫날밤 아무 일도 안 하느냐? 요샌 통 안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섭섭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는데 그 폭소는 다른 시대를 살았어도 이불 속 독학자들의 하는 짓은 비슷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경우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하늘은 높고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마비된다.’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써먹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의 이불 속에서 이뤄진 비밀스러운 독서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흔적을 남긴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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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

    Tracked from 룰루랄라 문화생활 | 2008/08/07 15:08 | DEL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이 사람들의 사상과 주관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친 책들에 관한 이야기! 좀 두서없는 글 진행방식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내용 자체만 놓고 보자면 마음에 드는 책이에요..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몇십권 늘어버리기도 했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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